1
연애. 그래 이 얘기부터 해보는 게 좋을 거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연애에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가. 내 유년기는 시시했다. 지나칠 정도로 특출나지도 않았고, 학(學)생의 본업은 해야 할 가치 조차 못 느꼈다. 고등학생 땐 바이크니 뭐니 해서 사소한 재미라도 있었다면 나의 열 다섯은 진흙 위 고인 웅덩이나 다름 없었다. 더럽고, 흔하고, 언제 사라질 지 모를.
“타츠, 고등학생이란 사귀는 기분은 어떻냐?!”
“그 누나 나한테 좋은 자꾸 뭘 사다줘. 호군가봐.”
깔깔대는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연애는 원래 다 저런 건가? 상대는 얼마나 널 좋아하고 있을 지도 모르잖냐, 쓰레기 자식들. 순수한 감정을 갖고 농락하는 꼴을 보니 쥐어 패고 싶었다. 어찌됐든 그 역겨운 장면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히부, 네 녀석도 돈 많고 예쁜 형 소개시켜주냐?”
가운데 중지를 치켜세우고 자리를 나왔다. 나의 사랑은 그게 아니야. 내 떨림은 너희들 따위와 다르다고. 운명이라 믿는 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맛대가리 없는 저 자식들과는 다른 진정한 사랑을 할 거란 말이다.
그렇게 열여섯. 나는 내 사랑을 찾았다.
2
해가 져서 어둑해진 초여름의 7시. 나는 이 시간을 가장 싫어한다. 날은 서서히 져 가는데 유흥거리의 자극적이고도 눈이 부신 불빛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차례로 하나 둘 씩 켜진다. 발등에 오 톤짜리 트럭을 올려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제 수명을 깎아내리는 듯하다. 괜스레 숙였던 고개를 든다. 여러 사람들을 마주한다. 땀 냄새와 음식냄새, 그리고 담배냄새가 거지같은 조화를 이뤄서 자극적인 밤거리의 냄새를 만든다. 역겨운 마음이 들어서 손가락으로 코를 부여잡는다. 기분 나쁜 느낌이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첫사랑을 찾았다면 믿어질까. 지금보다 늦어서도 안 되고 빨라서도 안 되는 짜증나는 시간, 저녁과 밤사이의 오후 7시.
꺾어 신은 스니커즈를 직직 끌며 시내를 돌아다닐 참이었다. 당구나 칠까. 지금 쯤 가면 중학생 때 같이 놀던 녀석들 한둘 쯤 있을 텐데. 그날은 유난히 안개가 그득그득 낀 날이었고, 유난히 할 일이 없던 날이었다. 아니다 그냥 집에 갈까, 돈은 얼마나 남았지?
60엔.
전철비도 없다. 이게 다 어제 운동화 밑창이 튿어져서 동네 수선집에 맡기고 오느라 그런 거다. 이놈의 신발은 왜 이렇게 빨리 닳지? 지금부터 걸어가면 어림잡아 두시간 정도 걸리겠지. 짜증난다, 습하다, 거지같다. 또 다시 신발을 직직 끌며 당구장으로 향한다. 신발이 이래서 빨리 닳는다는 점은 신경쓰려 하지 않은 채, 가서 누군가 만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싶어서.
“어이, 아는 자식이냐?”
내가 원한 건 이런 장면이 아니었다. 즐겨가던 당구장 앞에 웬일로 바이크가 그득 차있는 걸 보고 돌아갔어야 했다. 배달용이라 치기엔 너무 많고 화려한데, 좋지 않은 직감은 그냥 믿고 가지말았어야 했다. 습한 날씨를 싫어하면서 빨리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나를 원망해야만 했다. 계단을 올라 3층 당구장 문을 연 순간 내게 비친 풍경은, 다시 말하지만 내가 원한 장면이 아니었다.
“히, 히부키...”
역겨워 하던, 저질스러운 내 무리. 중학생 때 같이 놀던 녀석들은 여전히 당구장 안에 있다. 문제는 치마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무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는 점이다.
두뇌회전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신종이지메? 는 아닌 거 같은데. 어벙한 표정으로 멀뚱대다가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저 사람은... 그래, 분명 저기 무릎 꿇고 있는 녀석 중 한 명인 탓짱의 여자친구.
“아는 자식이냐고 물었잖냐.”
사납게 뻗친 머리, 자연 머리색이라곤 절대 안 믿기는 금발부터 시작해서 짧은머리 긴 머리 너나 할 거 없이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는 수식어는 떠오르지 않는 헤어스타일, 발목까지 내려오는 교복치마에 각양각색의 기다란 바람막이(나중에 알고보니 특공복이었다.)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 난생 처음 보는 옷차림이다. 양키랑은 좀 다른 느낌이고 야쿠자라기엔... 이것도 아니다.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저들을 보자 마자 느낀 점은 공포 보다는 동경에 가까웠다.
대답 대신 내 친구였던 무리를 한 번 바라본다. 구원의 손길이라도 닿은 것 마냥 풀어지게 웃는 모습이 보기 아니꼽다. 대충 살펴보니 정황은 이러하다. 저 자식들은 작년에 이어서 계속해서 쓰레기 같은 짓과 험담을 하고 다녔나보다. 그리고 꼬리가 길면 잡히기 십상, 여자친구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이다. 하필이면 그 돈 많은 고등학생 여자친구가 사회에서 말하는 ‘폭주족’이었던 게 상황의 시발점이겠지.
아는 사이냐고? 보통 이런 때 만화에선 모른척 한다. 그렇지만 저 녀석들이 아무리 역겹고 싫은 녀석들이더라도 함께 다녔던 의리가 있지, 모른척 할 순 없었다. 그러게 왜 꼬리 밟힐 짓을 하냐, 한심해 죽겠단 표정으로 녀석들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인디. 고등학생 무리는 ‘의리’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자신의 파를 건드렸단 죄를 우리에게 붙인다. 그때 생각한다. 맞는구나. 흔한 양아치들에게 걸린 생쥐마냥 쫄딱 맞고 죽기 직전의 상태로 병원에 실려가는 엔딩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타츠에게 다시는 우리 레이디즈의 위상을 깎아먹고 욕보이지 말라며 으름장을 내밀고 그대로 당구장을 나선다. 레이디즈라니.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급히 뒤따라 내려가니, 무리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있다.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자는, 벙찐 내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한다. 네 녀석의 의리에 꽤 감동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자는 괴롭히지 않는다. 궁금증이 해결 됐냐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바이크 무리는 그대로 해가 지는 쪽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 내 나이 열여섯, 나는 내 사랑을 찾았다. 정확히는 90% 정도 동경의 의미가 담긴 사랑이었지만, 의리와 사명감이 넘치는 여자 폭주 집단인 레이디즈에게 빠진 것이다.
3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바이크를 타면 멋있어 지는 건가? 특공복부터 사야 하나? 너무 겉멋만 든 건 아닐까? 그날을 분기점으로 내 사고는 양도 질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를 무기력하고 재미 없게 살아가던 내가 되고자 하는 목표가 생겼고, 갖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무작정 파트타임부터 구했다. 난 할 줄 아는 게 몸 쓰는 것 뿐이어서 처음엔 편의점을 갔다.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짤렸다. 공사판을 돌았다. 덕분에 피곤해서 학교를 이틀에 한 번씩 나가는 수준이 됐지만 상관 없었다. 목표는 공교육이 아니었으니까.
바이크를 샀다. 애칭을 붙여줬다. 인생 첫 친구가 생긴 느낌이었다.
연애 얘기를 했으니 우정 얘기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의리 좋고 매부 좋다 이거다. 문제는 의리를 지킬 친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전우? 동료? 전부 낭만적인 존재였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존재에 그칠 뿐이었다.
열 여섯에 동경하는 집단을 만나고, 바이크가 생겼다. 백날 천날 바이크랑 의리 지켜봤자 히부릉은 내게 상호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 친구가 필요했다. 바이크부를 만들기 이전의 이야기다.
미도스지 녀석을 만났다. 처음엔 같은 바이크를 몰고 하교 하기에 대수롭지않게 여겼다. 알고 보니 같은 반이었고, 그 녀석도 동아리가 없었다. 다다익선이라고, 뭐든 다함께 해야 즐거운 법 아니겠는가. 바이크부를 만들었다. 다 같이 바이크를 타고 돌아다니는 단체일 뿐, 레이디즈만큼 의리가 있지도, 코어가 탄탄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친구가 생기면 좋을 것 같아서 열심히 모였다. 주 목적은 반쯤 성공했다. 동아리원 네명 중 한 명만 친해졌기 때문이다(그리고 그게 미도스지라는 점이다).
“맞다... 내일 쿠기 태워줘야 하는데.”
너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기 일년 전이 맞겠지만. 평소와 다름 없이 미도스지와 바이크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누나, 소꿉친구. 어영부영 대충 대답해주는 그 녀석을 뒤로 하고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대면을 해본 적이 없으니 상상은 안 가지만, 어쩐지 저 녀석과 어울린다는 ‘선배’니까 통이 넓은 니삭스에 펑퍼짐한 가디건을 입고 다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니.
“부럽다.”
ㅡ 라는 감정이 이미지보다 먼저 다가왔다.
4
조금 따뜻한 옷을 입고 나올 걸 그랬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많이 타는 지라 평소에도 긴팔을 입고 다녔지만, 어름 밤의 날씨는 어이없게도 빠르게 추워져 얇은 후드 집업을 하나 걸치고 나왔어야만 했던 날씨였다. 비약한 몸에 애도를 표하며 선선한 추위를 느끼고 하품을 하며 걷고 있던 참이었다. 여름방학 시즌만 되면 뒤숭숭 한 게 사람 마음을 헤집는 신이 있는 게 분명했다. 별 볼일 없이 살았던 작년도 마찬가지였지. 그때는 뭘 했더라? 마음이 답답해서 이런 저런 생각들로 떨쳐보려 노력도 해보고, 입맛에 맞지도 않은 사탕도 물어보고,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전력질주도 해 봤지만 집단적으로 몰려오는 이 감정엔 대처할 수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레퍼토리를 마련하지 못한 미련한 열 일곱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 주변만 뱅글뱅글 돌 뿐이었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일까.
체육대회 날 저녁, 너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기 전까지의 보행은 셀 수 없이 길지도 모른다. 타이밍을 못 잡은 것도 있었지만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면 믿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은 첫인상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 ... 놀랐잖냐!”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새옹지마라, 겉멋 없고 우스꽝스럽게 놀란 모습이 공식적인 첫만남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몇 번 미도스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게 나 혼자만의 첫만남이라고 칠 수도 있겠다. 녀석의 바이크 뒷자리에 타는 널 보며 든 생각은, 의외로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는 아니었단 점이다.
“왜 잡아줘야 하는데?”
정말 세상 사람들은 다 나 같지 않구나. 계획이라 하기도 무안할 정도의 내 계획은, 저 말을 하면 상대도 어이 없어하며 잡아달라고 소리칠 줄 알았다. 내가 너무 그런 사람들만 만나왔구나. 손을 잡고 일으켜줄 심상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 미도스지 친구라고 다 그 녀석 같은 건 아니네.
내가 너와 말을 섞기 위해 얼마나 고대해 온 첫만남인데,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나... 잠깐 드라이브 갔다 올까 하는데. ... 같이 갈래?”
초등학생 때 생일파티에 친구 초대하는 것만큼 긴장한 채로 물었다. 심야엔 단속도 안 할 거 같다는 구질구질한 말까지 붙여가며.
다행히도 넌 흔쾌히 받아들였고, 바르게 살아서 이런 일탈도 로망이었다고 말했다.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만, 넌 정말로 전교 1등 같은 이미지였다. 성실하지 않아 보인다는 말은 말 그대로 오기였다. 이렇게 하면 네 관심을 끌 수 있다느니 뭐라느니. 시덥잖은 장난이나 치며 농담 따먹기만 지속했다. 이렇게 편하게 장난 쳤을 때가 언제였지? 재밌는 녀석을 미도스지 혼자만 알고 있었다니. 왜 그 녀석이 너랑 노는 지 알 것만 같았다.
“선배녀석... 손 들고 무단횡단 하는 느낌이네.”
그러니까 나는, ... 너랑 더 친해지고 싶었다.
5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갑작스레 거세진 빗방울은 화물차 타이어에 튀어 분수를 이루고 있었고, 하늘에선 갑자원 경기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천둥 북을 쳐 내리고 있었다. 혼자 있기에 집은 너무나도 넓어서 답답할 지경이었다. 평범한 원룸일 뿐인데 혼자 써서 그렇다고 느끼는 건지, 항상 둘이 있던 기숙사에서 오랜만에 벗어났기에 더욱 혼자라고 느끼는 건지. 시계침 소리는 귀를 거슬리게 하며 난간에 부딪혀서 틱틱대는 빗방울 소리는 낡은 실로폰 연주 같았다. 그것도 아주 싸구려 지하 재즈바의.
선물을 주고 받았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털이 북실북실한 열쇠고리를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난다. 제법 웃긴 선물을 주는 구나 싶다. 글씨체 조차 필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과자 눅눅해 질텐데. 기숙사에 두고 올 걸 그랬나.
“너한테 길들여졌나봐…”
네 향이 나는, 정확히는 날 떠올리게 하는 향수를 뿌리고 방 안에 가만히 눕는다. 네가 농담삼아 던졌던 말들을 떠올리며 향에 심취한 듯 눈을 감는다. 한 번 뿌렸던 향이 사라지면 다시 또 뿌리고, 이번엔 두 번 뿌렸다가 다음엔 세 번. 아직 향이 남아있는 방에 다시 네 번. 어쩌면 길들여진 건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향뿐만 아니라 너에게까지도.
6
풍선껌을 삼키면 이런 기분일까. 어릴 적에 껌을 삼키면 배탈 난다고 했는데, 독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목으로 넘어가는 달콤한 유혹을 참지 못하고 굳이 짧은 탄식을 느끼려 한다. 그게 참 간사하면서도 또 다시 껌을 삼킬 기회가 오면 주저하지 않고 번복 해버린다.
“왜 또 노잼 표정인데.”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네가? 그 자리에 서서 두시간 동안 명부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름이 잘못됐나. 아니면 우리학교에 쿠기미야가 둘인가? 뭐가 됐든 좋았다. 내가 네게 가진 호기심과 호감이 아니더라도 생판 모르는 남과 하는 것보단 백 배는 좋았으니까. 문제는 어디까지 해도 되는 지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날 바라보는 널 한 번 바라보고, 다시금 마른 입술을 적시고. 그대로 네게 입을 맞추고. 노래 가사라도 되는 양 하나 둘 씩 천천히 스텝을 밟아가며 진행한 뒤, 입술을 떼어냈다. 부끄러움을 무마하기 위해 널 번쩍 들어 올리고, 나 자신에게 핑계를 댄다. 커플게임일 뿐이잖아.
나는 앞서 말했지만 친구가 없다. 친구는 고사하고 눈치 또한 없고 용기도 없다. 나는 눈치도 없이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이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찌질하게 뒤에서 응원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속상하고 서운할 때마다 우는 건 진심으로 거지같은 버릇이다. 입술 꽉 깨물고 시선은 상대방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 하면서 하고싶은 말도 어물정 거리며 한다. 3초 정도 입 다문 뒤에 한숨 내쉬고 다시 말 꺼내보아도 목소리가 흔들리는 건 감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잡은 손은 놓치지 싫어 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마음으론 알고 있어도 네게서 한 묶음 더 다가가려 한다.
“너에게 사랑해, 라고 말 해주는 녀석도 있을 거야.”
이거면 됐다. 그래, 난 이거면 됐다. 단기간에 너로부터 느꼈던 감정, 호감, 느낌, 이미지, 언어 그 모든 걸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느꼈지만 여기서 그만두려 한다.
양귀비가 피는 계절이 지났다.
7
이 감정이 불쾌했다. 느끼고 싶지 않았다. 긍정적인 감정이 아닌 부정적인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땐 꼴에 사랑한다는 작자들이 우습기만 했는데, 내가 그 꼴이 되니 말이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감정(사실은 이게 사랑인지 확신이 들지도 않았지만)에 앞서 상대의 친구조차 질투하다니. 나 답지 않았다. 질투가 웬 말인가 싶었다. 위와 같은 감정이 들 때마다 베개에 머리를 몇 번이고 박아가며 느낀 감정을 후회하기 바빴다.
빌어먹을, 그래 이게 다 그놈의 키스 때문이다. 홧김에 맞춘 입 때문에.
매일매일이 후회의 연장선이다. 내가 좀생이스럽지만 않았다면 이딴 부정적인 감정들은 안 느꼈을 텐데. 그때 키스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분이 오묘하지도 않을 텐데. 아니 애초에, 애초에 너에게 그때 말을 걸지 않았다면, 애초에 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널 좋아할 일도 없었을 텐데.
능소화가 피기 시작했다.